20250220- 귀천 후기
2025년 상조후불 2월 3일 어머니가 먼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어느덧 18일이 지나고 있다.황망한 마음을 추스르고 지나간 시간을 정리해 본다.1. 마지막 여행2024년 12월 2일부터 4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어머니를 뵈러 대구를 찾았다.늘 바다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포항을 가보고 싶다고 하시고는 티브이에서 본 물메기탕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포항 인근 물메기탕 맛집 월성 식당을 찾아 물메기탕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영일만 바다가 보이는 도구해변으로 갔다.힘겨워하셨지만 즐겁게 바다 구경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왔다.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2. 와병어머니의 엄지발가락에 통풍이 왔다.아프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누님이 병원을 방문하여 약 처방을 받고 앞으로는 기름기 많은 치킨 같은 것은 드시지 않도록 하기로 하였다.그런데 12월 7일 통풍이 척추 전체로 퍼졌다.12월 9일 병원 의사의 처방에 따라 뼈주사를 맞았는데 그 이후론 걷지 못하게 되었다.정상인도 뼈 주사를 맞으면 3달 고생한다고 하는데 체력이 약해지신 어머니에게는 크게 부담이 되었다.잠시나마 의사를 의료사고로 고발할까 생각했으나 90세를 사셨으니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였다.상황이 심각해 아내와 같이 12월 10일 대구를 방문했다.이날마침 동생이 업무차 대구에 들리게 되어 3형제가 어머니의 사후를 논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중요한 것은 장례절차.먼저 장지는 아버지 산소 옆에 있는 잔디 위에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것으로 합의되었다.누님은 아무 표식 없이 아버지 산소 위에 뿌리기를 원하였으나 나의 의견이 관철되어 잔디장으로 하기로 하였다.가톨릭 묘원인 군위묘원으로 모시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으나 1구당 비용이 250만 상조후불 원이고, 아버지의 산소와 멀어 관리하기 어려워 포기하였다.장례방식은 세 자녀 모두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신부님을 초빙하여 미사를 드리기로 쉽게 합의되었다.그리고 남은 재산이 있으면 어머니를 한 집에서 모셨던 누님에게 몰아주기로 합의하였다.막상 어머니를 보니 의식은 또렸했으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누워만 계시기 시작하였다.건보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을 하고 등급판정을 받기로 하였다.욕창이 걱정되는 상황이라 전동침대와 에어백을 건강지원센터에서 빌려 설치하였다.한 달에 1만 원 정도의 임대료가 있었다.기저귀를 늘 착용하는 상태가 되어 누님의 고생이 시작되었다.요양등급이 나왔으므로 성인용 기저귀는 건강지원센터에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그동안 방문목욕을 한번 받았다.1회 비용은 5천 원.산본으로 올라온 후 나는 25년 전 아버지의 장례를 바탕으로 임종이 닥쳤을 때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가도록 누님에게 카톡으로 알려 주었다.나는 머지않아 있을 어머니의 임종을 예상하여 대구 집 근처의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소요비용을 추산하였는데 대략 8백만 원 전후의 금액이 소요될 것으로 나와 누님과 동생에게 미리 알려 주었다.장례식장은 칠곡경대병원 장례식장을 선택하였는데 비용이 홈페이지에 사전 공지되고 있어 여타 후불상조회사의 비용과 비교해 볼 수 있었다.칠곡경대병원 장례식장은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다 보니 인지도가 있고 찾기 쉬우며 비용 측면에서 외부의 사설 상조회사보다 대략 10~15%가량 저렴하였다.12월이 가기 전, 어머니는 병자성사를 받으셨다.태전성당의 젊은 보좌신부님이 오셔서 성사를 베푸셨다.어머니가 편안해 하셨다고 누님이 전화로 알려 주었다.임종이 걱정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진 12월 31일 손녀인 딸과 함께 대구를 방문했다.딸에게는 이것이 생전의 상조후불 마지막 할머니 모습이었다.2025년 1월 10일 대구를 찾은 이후 1월 20일 다시 어머니를 뵈러 갔다.여전히 차도가 없으신 어머니.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 생전의 모습이었다.경기도와 대구에 떨어져 있어 임종은 오롯이 누님의 몫이 되었다.3. 임종2월 3일 9시경 누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어머니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하였다.미리 알려 준 대로 119에 신고하였다고 하였다.그런데 응급구조사의 지시대로 누님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갈비뼈가 부러졌다.누님이 전화로 응급구조사를 연결해 주어 내가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히자 응급시술을 중지하였다.그런데 병원으로 이송하지 않고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검시를 위한 경찰과 사망진단을 위한 의사가 방문하여 시체검안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덕분에 사망확인 비용 45만 원이 들어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되었다.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심장사.임종의 조짐은 가래가 끊고 손가락의 핏기와 온기가 사라진 것이었다.사전에 약속한 대로 누님이 칠곡경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전화를 걸어 이용의사를 밝히자 운구차를 보내주었다.그사이 나는 산본에서 대구로 내려갔다.가는 도중에 아내의 전화로 병원 상조를 이용하는 것과 부고안내문과 사용할 빈소를 결정했다.당초 가장 작은 특실을 쓰기로 하였으나 우리가 원했던 장례식장은 이미 다른 상주가 사용 중에 있어 그보다는 큰 빈소를 사용하게 되어 50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월요일 10시에 임종하신 것으로 하여 시체 검안서를 받고 장례식장을 결정한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대구시에서 운영하는 명복공원의 화장장을 예약하는 것이다.다행히 수요일 오후 1시에 자리가 비어 있었다.하루 늦게 임종하셨다면 3일장이 아니라 4일장이나 상조후불 5일장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4. 장례식2월 3일 오후 5시경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영정사진과 빈소의 꽃은 누님의 배려로 준비가 끝나 있었다.비단 수의는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두어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았다.관은 화장임을 고려하여 가장 저렴한 오동나무관으로 하였다.요즘은 더 저렴한 화장용 종이관도 있다고 한다.상복도 11명 모두 빌려 입었다.장례식장에서 마련해 준 부고문자를 카톡을 통해 지인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장례가 시작되었다.가톨릭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으므로 제단 위에 음식을 올리고 그때마다 온 가족이 모여 절을 하는 유교식 절차인 상식이 없어 특별히 가족들이 할 일은 없었다.2월 4일 오전 10시에 입관의례가 있었다.누님의 주장대로 미리 5만 원을 넣은 촌지 봉투를 염습사에게 건넸다.특별히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어서 마지막 모습 그대로 깨끗하게 흰 비단 수의를 입은 어머니를 뵐 수 있었다.심장이 멎어 따뜻한 피가 돌지 않은 어머니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남은 유족들이 모두들 한 번씩 어머니의 시신을 쓰다듬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부고를 들은 친지와 지인들의 방문은 임종 당일 저녁부터 이어져 2월 4일 밤늦게까지 이어졌다.주방 도우미는 2명을 이틀간 지원받았다.누님의 주장대로 2만 원씩 팁을 건네주었다.상조물품은 외손자와 손녀가 삼성전자에 재직하고 있어 큰 박스 4개가 도착했다.한 박스도 채 다 쓰지 못하고 장례가 끝이 났다.2월 5일 10시 장례미사를 가졌다.따로 성당으로 이동하여 미사를 치르기는 번거롭다는 의견을 반영하여 빈소에서 신부님을 초대하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평소 인연이 있는 압량성당의 이 사무엘신부님을 초빙했다.다행히 상조후불 빈소가 넓어 미사 드리기에는 넉넉했다.신부님을 중심으로 둥글게 가족이 둘러앉아 미사를 드렸다.장례 미사 전 신부님의 권유로 냉담 중이던 나와 아내와 동생 등이 고해성사를 진행했다.나는 독서를 맡았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제대로 읽기 어려웠다.내가 성혈을 원샷하는 것으로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은 미사도구를 챙겨 돌아가셨다.신부님에게는 100만 원의 사례비를 드렸다.11시 화장장으로 출발했다.운구 버스는 30인승 한대를 빌려 우리 가족 11명이 타고 이동했다.운구 버스 기사에게도 누님의 주장대로 2만 원의 팁을 봉투에 넣어 주었다. 관은 나와 자형과 동생과 외손자 이렇게 4명이 들었다.친손자는 영정을, 친손녀는 위패를 들게 하였다.화장이 시작되기 전 어머니의 관에 신부님이 주신 성수를 뿌리고 잠시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예전엔 1시간 이내에 화장이 끝났으나 고열로 인해 기기고장이 잦아 요즘은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화장시간이 점심시간과 겹쳐 미리 도시락을 주문했다.혹시나 동행하는 친지가 있을까 해서 15,000원에 20개를 주문했는데 장지까지 동행한 일가친척이 없어 기사에게 한 개 주고도 8개의 도시락이 그대로 남아 집으로 싸가야 했다.점심 식사 후에는 방갈로에 모여 30분이 소요되는 긴 연도를 바치는 것으로 추모의 마음을 다했다.유골이 나올 즈음에서야 유골함을 준비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부랴부랴 명복공원 경내에 있는 매점에서 나무 유골상자를 1만 원에 준비했다.2시 30분이 되어 어머니의 몸은 가루가 되어 나왔다.다른 가족들은 운구 버스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복귀하여 환복 후 집으로 가고 동생과 나는 미리 약속한 대로 아버지의 산소가 상조후불 있는 고향 선산으로 유골함을 들고 동생 차로 출발했다.4시경 선산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에 도착했다.예전에 밭으로 쓰였던 주변에는 가시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어 걸어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영진, 호진, 석진 형님이 소식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헌화용으로 썼던 흰 국화 30송이를가지고 가 잔디 위에 하트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어머니의 유골을 골고루 뿌렸다.같이 올라와 준 세분의 사촌 형님과 함께 두 번의 절로 이별을 고한 뒤 남은 유골함은 산불 위험이 없는 안전한 밭 위에서 태워 묻었다.이로서 모든 장례절차가 끝이 났다.남은 일은 조그만 표지석을 준비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곳에 표시를 남기는 일이다.
5. 장례 비용장례식장에 모인 부의금은 모두 1,660만 원이었고 지출은 960만 원이었다.당초 예상보다 비용이 추가된 것은 사망진단서 비용과 식비와 장례식장 비용이 각각 50만 원 이상 추가되었기 때문이다.각자의 계좌로 들어온 부의금은 각자가 처리하고 장례식장에서 받은 부의금에서 지출을 뺀 나머지 700만 원은 간병으로 고생하신 누님에게 드리기로 하였다.자세한 지출 내용은 붙임으로 남겨둔다.6. 주택연금 정산어머니는 그동안 주택연금을 받으셨다.일시금 2천만 원과 매달 89만 원을 받으셨는데 그동안 받은 금액이 모두 1억 1천만 원이 되었다.주택금융공사에 상환금액을 문의하니 그동안의 이자를 가산하여 1억 3천5백만 원을 상환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연평균 5%가 넘는 이자율이었다.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이자와 비교해서 낮지 않은 이자율이므로 형편이 된다면 주택연금을 받지 않는 것이 유리해 보였다.우리에게는 일시불로 상환할 상조후불 경제 여력이 되지 않으므로 상환 방법은 집을 팔아서 갚거나 주택금융공사에 집을 넘기는 방안 둘 중의 하나였다.주택금융공사에서는 현재 집의 시세가 2억 1천만 원이라고 알려 주었지만 대구지역의 아파트 공급 과잉으로 매매가 쉽지 않을뿐더러 20년이 넘어 낡은 데다 1층인 아파트여서 제 가격을 받고 팔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아내가 주변 부동산에 문의해 본 결과 완전히 수리된 집이 1억 8천만 원에 겨우 매매되었다며 거래가 거의 없다고 알려주었다.따라서 집은 주택금융공사에 넘겨 경매로 진행하고 다행히 차액이 남으면 누님에게 돌려 드리는 것으로 결정하였다.경매는 법원에서 이루어지는데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된다고 한다.그때까지 이자가 추가되고 경매비용 300만 원과 등기비용 3백만 원이 추가로 소요된다고 하였다.아마도 1천만 원도 남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다행인 것은 경매가 낙찰될 때까지 누님과 외손녀가 현재 어머니의 집에서 계속 거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7. 표지석어머니의 유골을 뿌린 자리에 표지석을 설치하기로 하였다.덩달아 그동안 봉분만 있던 아버지 묘에도 조그만 표지석을 같이 설치하기로 하였다.제대로 하자면 수백만 원이 들 일이지만 쿠팡에서 온더스톤 제품 2개를 구매하여 65만 원으로 해결했다.돌에 새길 글자는 미리 누님과 동생과 협의해 두었다.생년월일은 모두 양력으로 하였고 손자 손녀의 이름은 공간에 여유가 없어 포기하였다.그리고 국화로 표시해 둔 어머니의 산골 지점을 장식하기 위해 백색 조경석 10kg을 8천 원에 쿠팡에서 구매해 두었다.3월 15일 누님과 동생과 함께 산소에 올라가 표지석과 조경석을 설치할 상조후불 예정이다.8. 소소한 뒷 처리사망신고는 장례식이 끝난 후 이틀이 지나 누님이 주민센터를 방문하여 처리하였다.신분증과 시체검안서가 필요하다.호적등본에 게재되는 데는 2주가 필요하다.누님은 집에 있던 유선전화와 어머니의 핸드폰을 끊었다.해당 기관에 전화로 신청하면 된다.2월 3일 돌아가셨으므로 2월 25일에 국민연금이 마지막 입금으로 입금될 것이다.어머니의 통장은 그 이후 해지해야 하는데 300만 원 이하이면 대표 가족의 신분증만 있으면 해지가 가능하다고 하였다.은행업무를 간소하게 처리하기 위해 어머니가 임종하시기 전에 큰 금액은 미리 누님 계좌로 옮겨 두었다.9. 표지석 설치3월 15일 11시 누님과 동생, 용진형님과 형수님, 아내와 조카 둘이 선산 형님집에 모였다.표지석이 생각보다는 무거워 호진 형님의 트랙터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운전은 용진형님이 맡았다.화강암으로 만든받침돌을 놓기 전 흙을 돋워 얼추 수평을 맞췄다.어머니의 유골 가루는 잔디 위에 그대로 있었다.국화는 시들었지만 그 사이 바람이 크게 불지 않았고 큰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흰 조경석을 이용해 하트 모양으로 유골 가루를 덮었다.여름에 비가 내리면 가루는 잔디밭으로 스며들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돌을 놓고 접착제를 바른 후 검은 돌을 올려 마무리했다.대략 1시간이 걸렸다.지난 25년간 문패 없던 아버지 산소에 마침내 문패를 달아드렸다.산소에 올라온 8명이 소주를 올리고 절 두 번 하는 것으로 참례를 마쳤다.이로써 자식으로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쳤다.공허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산을 내려왔다.
4월 6일 누님이 어머니의 묘역을 손보았다고 사진을 보내왔다.좀더 단정해졌다.
장례비용.xls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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