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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진스 나독신크림 오피셜 M/V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354–430)는 서양문명의 건설에 필수불가결한 기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그리스도교 문화를 넘어 서구 문명 전체에 이른다. 인사이드에 갇혀있기를 고집하지 않고 대립하는 두 세계를 붙여놓고 통합하는 데 능한 철학자, 신학자, 사제였다. 위대한 절충주의자(eclectic)로, 장르 혼합차(genre-bender)로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 철학(philosophia christiana)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며,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신앙’과 ‘이성’을 모두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세계관을 구축했다. 중세 서구의 면학 체계가 그의 『그리스도교 교양 De christiana doctrina』을 기준으로 체계화되었다는 사실은 서구 세계뿐 아니라 인류 문명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리스도교 교양』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적인 수사학과 소피스트적 수사학을 통합했고,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방 나독신크림 문화(주로 페르시아 문화)를 절충했다. 『그리스도교 교양』 2부에 인용된 로마 극작가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Publius Terentius Afer, B.C. 195-159)의 경구 ‘Ne quid nimis’는 변증가, 호교론자(apologist)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에토스를 함축한다. ‘Ne quid nimis’는 그리스어 ‘μηδέν άγαν’(메덴 아간)의 라틴어 번역으로서 ‘그 어떤 것도 지나치게 하지 마라((do) nothing in excess)’는 중용(中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구절을 인용한 맥락은 서구 또는 서방교회(the Western Church)의 그리스도교 문화가 페르시아를 비롯한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적용해야 할 원칙을 제시하는 데 있다. 아시아권과 서구 문명이 만났을 때 나왔던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인식이 여기서는 거꾸로였다. 서쪽 문명은 그리스도교 교리[道]이고 동쪽 문명은 기술[器]이었던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비전은 페르시아의 나독신크림 역사, 이과계, 공과계, 수리계 지식을 그리스도교 문화에 접목하는 것이었다. 이 자체가 금기를 깨고 나가 아웃사이드와 접촉하는 문화적·사회적 모험이기 때문에 기준이 될만한 원칙이 필요한 것은 당연했고, 이에 당대의 신앙적·문화적 아이콘인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간명한 금지 메시지를 원칙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 문명의 대변인으로서 ‘판문점 메시지’를 내놓았던 셈이랄까?: ‘이방 문화가 좋은 건 알겠지만 적당히들 취하여 중용의 도를 이루라.’켄슬컬처에 찌든 멍청한 목사들이 인사이드/아웃사이드 충돌 상황을 두고 ‘저쪽 거 하지 마라. 우리가 우월하다.’는 식의 메시지를 남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교리스도교 문화의 발달사를 배운 적도 없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부 중의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수사학적 원칙은 매우 현실적이다. 나독신크림 그는 신앙의 적인 이교도들의 문화를 깊이 존중한다. 단순히 그 안에 취해야 할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실용적인 태도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닮은 게 아닐까?) 솔직해져라. 이쪽의 결핍 때문에 저쪽의 긍정적인 콘텐츠를 흡수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 문화는 문과계였고 페르시아 문화는 문과계 밖의 모든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다. 위대한 교부는 ‘그리스도교가 위대하니까 다른 놈들의 문화 따윈 다 필요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건 좋은 거다! 중요한 것은 두 문명세계가 만날 때의 비율이다. 가령 어떤 일은 6:4 정도로 섞이는 게 좋고, 다른 일은 5.5:4.5 정도의 비율이 딱 맞는다. 이 과정 가운데 양쪽 문명이 서로를 배운다. 나는 나독신크림 호스트가 되고 카운터파트는 게스트가 될 뿐이다. 문명의 일은 십자군 전쟁이 아니다. 저쪽을 무너뜨리고 10:0이 돼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자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요한복음 10:10). 멍청하고 위험하다. 언제나 관건은 취하고 다듬어서 중용의 상태를 발견하는 데 있다. 그것이 신께서 기뻐하시는 선(good)과 연결되어 있다. 나사렛 예수 자신도 알고 있었을 금언 ‘Ne quid nimis’(B.C. 2세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 프로세스를 압축하는 키워드로서 기억해 둘 만하다. 키워드는 뺄셈이다. 상대 문화를 탐닉하면 비율이 무너진다. 내 것에 경도 돼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더하고 적절히 빼라. 그러나 빼는 데 유의하라. 콘텐츠 문해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시대의 추세는 이 고대의 수사학 원칙을 나독신크림 더욱 실용적으로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뉴진스 음악의 오리지널리티는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을 떠오르게 한다. 1991년 앨범 ;(2024)은 또 어떤가?) 지금까지 들은 바 뉴진스는 앞으로 20년쯤 뒤에 들어도 오리지널하게 들릴 것이라는 데 1000원을 건다. 뉴진스 사운드 또한 매시브 어택처럼 다양한 재료를 요리하여 다른 세계의 결과물을 낳는 데 성공했다. 신기하다. 뉴진스라는 이름 아래 모인 모든 것은 특정 장르나 스타일로 달려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재료가 몇 가지로 제한되어 있을까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음악을 잘 몰라도, 뉴진스 작품에 일렉트로니카에 속한 여러 하위 장르의 모티프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는 것만은 초견만으로도 쉬이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끌어다 쓰지만 그 나독신크림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결과물은 어떤 경지에 오른 듯하다. 뉴진스가 이루고 싶은 것은 뉴진스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지만 더도 말고 덜도말고 뉴진스인 그런 예술/비지니스. 그래서 경이롭다. 지금 뉴진스 음악은 뉴진스가 되려는 것에서 피하려는 것을 뺀 결괏값의 앙상블이다. 날카로운 아카이빙과 레퍼런싱을 통해 찾은 모티프들의 플러스 력(力)과, 거기서 필요한 것 이외에는 취하지 않는 마이너스 력을 매칭하고서 크림 중의 크림, 고갱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아낌없이 버린다. 중요한 것은 호스트(뉴진스인 것)과 게스트(여러 장르에서 선택된 조각들) 사이의 비율이다. 트랩의 요소가 있다고 해서 트랩이 앞으로 도드라지면 안 된다. 드럼앤베이스가 뼈대를 이룬다고 ’90년대 DJ 음악이 나독신크림 돼서도 안된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는 않다’(고린도전서 10:23). 깎고 또 깎고 나온 재료가 또다시 세공되어 뉴진스의 일부로 포함된다. 그렇게 남의 살이었던 장르 모티프가 이제는 뉴진스의 살이 된다. 집요한 뺄셈의 스펙터클이 남긴 천의무봉한 옷 한 벌이 남는다. 어쨌든 과하지 않고 선선하고 모난 데 없이, 무해한 음악세계가 완성된다. 남녀노소, 국적과 상관없이 인정과 사랑의 대상이 된다. 창작자들의 예리한 직관으로 이루어진 뺄셈의 승리이다. 이런 음악은 베끼는 것도 쉽지 않다. 보통 장르의 차용은 대개 덧셈 원칙을 따르지만 뉴진스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그건 기본적으로 뉴진스 음악이 부(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돈과 물량을 쏟아붓고 아닌 척하기. 나독신크림 그래서 대단하다.